[김문호 에세이] 좋은 수필 쓰는 법?

피앤피뉴스 / 2025-06-12 14:29:08
“좋은 수필 쓰는 법?”


김 문호

 


변두리에서 밭뙈기나 일구면서 지내는 시간이 느슨합니다. 거실 너머 먼동이 하루를 열고 마당 가의 수림이 사시(四時)의 운행을 전하니 시계나 달력을 자주 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달이 바뀌었음을 일깨우는 것은 한국문인협회의 『월간문학』입니다.

바로 그 월간문학의 겉장을 넘겨 들다 보면 눈길을 잡는 쪽이 있습니다. 문인협회 평생교육원의 문학 강의 광고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90분짜리 다섯 강의가 빼곡한 시간표입니다. 이 나라 문예 중흥의 치열한 산실인가 합니다. 그러면서 얼핏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강의하는 것일까, 글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가능키나 한 것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월간문학의 독자 대부분은 이미 등단을 하고 협회에도 가입한 소위 기성작가들일 텐데 말이지요.

김환기, 이중섭 등과 함께 한국의 현대 화단을 수놓던 장욱진 화가의 말년 고택이 인근에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의 일화가 있더군요. 한 학생이 그리기에 도움을 청하자, “내가 네 그림을 어떻게 돕느냐”고 호통을 쳤답니다. 시각 매개의 그림이 그렇거늘 황차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글쓰기임에요.

청탁받은 글의 주제가 좋은 수필 쓰기라고 합니다. 별생각 없이 응낙했다가 막상 초를 잡기가 난감합니다. 대저 글이란 쓰는 사람의 인성, 철학, 정서, 문체와 구성의 기교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개념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더구나 직접 경험하고 느낀 삶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서 말입니다.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던가요. 국문학자도, 문학평론가도 못 되는 내게 청탁이 온 것은 무슨 현학적 이론을 펼쳐 보라는 뜻이 아닌 것도 같거든요. 그러고 보면 쓸거리가 영 없지도 않습니다.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歐陽脩)의 ‘삼다(三多)’가 그렇습니다. 열심히 읽고(看多), 깊이 생각하며(商量多). 많이 쓰라는(做多) 것 말이지요. 그를 포함한 소위 당송팔대가들이 중국의 수필을 태동시킨 당사자들이기도 하니까요.

그들 이전의 중국에도 산문 형식의 글이 있었답니다.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가 그 효시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한나라,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나라 중엽까지 천여 년이 흐르면서 부(賦), 변려문(騈儷文)이라는 형식으로 발전했지만, 시(詩)의 언저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답니다.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거나 귀족들 사이의 교환수단으로 쓰이면서 여전히 운율과 대귀를 중시하는 문장형식이었거든요.

안녹산의 난으로 절대왕권이 약화되면서 민중이 대두되는 후기 당나라와 북송의 여덟 대가가 한결 쉽고 유순한 문체의 새로운 산문이론을 주창한 것이지요. 중국의 문학사를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 등으로 정리하는 이치가 그것인가 합니다. 그래서 이들 팔대가는 주옥같은 시편들을 후세에 전하면서도 시인 대신 문장가 또는 문학가로 불린답니다.

구양수의 삼다 중 「많이 쓰기」에 누구보다 충실한 사람은 바로 동파 소식(蘇東坡)이었습니다. 아버지(蘇洵), 동생(蘇轍)과 함께 여덟 대가 중 세 자리를 점하는 소위 삼소(三蘇)의 중심이었지요. 그가 고쳐 쓰면서 버린 종이가 3천 삼태기라고 합니다. 환갑을 겨우 넘기면서 공직까지 지낸 평생에 삼십여 년 글을 썼다면 사흘에 한 삼태기씩 내다 버린 셈이지요. 그때는 종이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가 송나라 4대 서예가의 일익을 겸했다고 하더라도 바람 든 이야기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글이든 글씨라도 쓰려면 이만한 근성쯤은 돼야 한다는 휘갑치기쯤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우직한 노인이 산을 옮겨 놓는다(愚公移山)는 뻥조차 그들에겐 통용이니까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경계까지도 뭉개면서 말입니다.

암튼 동양 초유, 어쩌면 세계 최초의 수필을 주창한 그들의 삼다 이론이야말로 수필 쓰기의 정론 아닐는지요. 그러나 이를 두고 수필 쓰기의 비법이라기엔 허허롭네요. 건강해지려면 잘 먹고, 잘 자며, 열심히 운동하라는 것을 두고 의사의 처방이랄 수 없듯 말입니다. 그러나 정녕 무슨 묘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 성적을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다면 공부 대신 그것만 파고들면 될 테니까요.

장욱진 화가가 청년시절의 6년으로 교수직을 접은 것도 누구를 가르칠 체질이 아니어서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누가 내게 “당신은 수필을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면 몇 구절은 긁적이게 될 것도 같습니다. 수필은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자기 감성으로 풀어내는 자신의 글이니까요. 그러기에 수필은 쓰면 쓸수록 손해를 보는 글이기도 합니다. 꼭꼭 싸 묶는 세상 앞에서 스스로 한 꺼풀씩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니까요.

고교 시절, 피천득의 「수필」이 좋았습니다. 청자연적의 연꽃잎 하나가 약간 꼬부라진 파격의 균형이 수필이라는 구절이 사춘기의 감성을 사로잡았지요. 그런 한참 후에 어쩌다가 수필을 쓰게 되면서,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한 여인의 날렵한 몸맵시”라는 피천득의 그 어느 것도 수필이 아니라는 구절이 와 닿기도 했습니다. 수필이 안온한 서정의 테두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나 이 나이에 들고 보니 양쪽 다 손색없는 수필인 것 같습니다. 다만 글쓰기의 다른 장르처럼 각박하고 치열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렌, 또 한 번 허황한 말장난이 되고 말았네요.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曰)짜 아니면 조선 초기 어느 정승의, 이것도 맞고 저것도 옳다는 청승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저마다 다른 삶의 단 하나 정답이란 신기루의 미망 같은 것 아닐는지요.

항구도시의 남향받이 중턱에 사무실을 꾸미고 여남은 직원들과 지낼 때였습니다. 맥아더의 동상이 있는 뒷산 공원에 저명한 서예가의 연구실이 있어서 붓글씨를 흉내 내고 다니기도 했지요. 점심 반주의 얼근한 취기로 올라가서 창문을 열어젖히면 마파람 해풍에 실려 드는 매미 소리가 맑고 시원해서, 무시로 드나들면서 말이지요. 간혹 한복 차림의 풍채 좋은 노인 한 분이 나와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반주 탓인지 불콰한 얼굴로 내가 들든 나든 아랑곳없이 붓질만 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쓰는 한문 구절을 넘겨다본 적 있었습니다. 너 따위는 봐도 모른다면서 방임하는 것 같은 글의 내용이 재밌었지요. “내 붓끝에서 진주 알이 쏟아지건만 아는 이 없으니,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쓰고는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저무는 숲으로 날린다.”

렌, 수필 또한 그에 진배없을는지요. 누가 알아준다거나 내세울 일 없이 그냥 슬며시 쓰게 되는, 누구 아니면 무엇을 향한 그리움이거나 고백 같은 제 넋두리 말입니다. 신록이 꽃보다 고운 계절에 공연한 글월 줄입니다. 내내 건강하소서.

 

 

김문호
한국해양대 졸업
대한해운공사 선장
한일상선회장
한국문협 해양문학 연구위원장
수필집 '윌리윌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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