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설악산 작은 암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봄의 꽃 수풀 속에서 기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그 향기에 취해 작은 키에 머리를 깎은 한 스님과 마주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얼마 전 서대문 형무소 전시관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만해 한용운: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는가?
윤공 오대혁: 만해 스님 아니십니까?
만해: 알아보니 다행이네. 어쩐 일로 이렇게 나를 찾았는가?
윤공: 스님께 여쭤 볼 말씀이 산더미입니다.
독립운동
윤공: 스님께서는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미독립선언서」의 강령도 쓰시고, 옥고도 치르시면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찬탄해 마지않습니다.
만해: 아니야. 내가 부족했어. 결기만 있었지 대중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독립운동도 제대로 못한 듯해 참으로 아쉬워.
윤공: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만해: 생긴 것도 그렇고, 성정도 적잖이 표독했어. 웬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대중과 잘 화합하지 못했네. 말도 많고, 절간에서는 대중들과 화합하면서 ‘화광동진(和光同塵: 불보살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속인들 사이에 태어나 중생과 인연을 맺어 중생을 불법으로 인도함.)’을 해야 할 터인데 그리 못했어. 대중들이나 스님들에게 부처님의 참뜻을 전달하겠다고 『조선불교유신론』도 쓰고 『불교대전』, 『십현담주해』도 썼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어. 게다가 기미년 독립선언도 뜻대로 되질 않았어.
윤공: 당시 2천만 조선 민중이 독립을 부르짖은 3.1운동의 도화선이 3.1운동 지도자들의 선언서와 활동에 있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해: 아직도 난 기억하네. 학생대표 세 사람이 태화관에 나타나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면서 기생방 뒷구석에 숨어 있는 일은 무엇이냐, 그래가지고 무슨 독립이 되겠느냐고 울부짖던 소리를 말이야. 청원만으로 일본이 독립을 허용하고, 소극적인 무저항주의로 일관하는 투쟁으로 독립을 꿈꿨고, 독립이 달성되면 어떤 국가를 건설할까 하는 점도 생각지 못했어. 결기만 앞섰지, 지도자 역할을 똑바로 하지 못한 것 같네.
윤공: 아닙니다. 그래도 스님은 다른 민족 대표 분들과 많이 달랐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취조서들을 보면 많은 대표들이 “일본에 반항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라고 한다든가, “합방 이후 정치는 이전보다 잘되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번 계획에 참가하였으며 그것은 잘못이었다.” 따위의 진술을 하고 있었을 때, 스님만큼은 달랐습니다. 이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 것이다.”와 같은 답을 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식, 보석, 변호사도 거부하시면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확고히 밝히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정신만큼은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이 되어 만대에 남으리라 확신합니다.
만해: 부끄럽네. 그때 좀 더 조직적으로 착실히 준비했더라면 그 많은 희생은 없었을 것을.
만해사상의 기원과 『님의 침묵』
윤공: 문학연구자로서 제가 늘 궁금했던 것이 시집 『님의 침묵』이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 했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건 완전히 연시(戀詩)잖습니까? 열열한 사랑을 노래하는 『님의 침묵』은 스님의 불교사상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가요?
만해: 허허. 그런 걸 연구하는 게 자네가 할 일이 아니던가?
윤공: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보기로는 『님의 침묵』이 스님이 주석을 다신 『십현담주해』의 불교적 논리와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데, 맞는 겁니까?
만해: 『십현담』은 동안(同安) 상찰(常察) 선사가 지은 선화(禪話)지. 비록 글은 평이하지만 그 뜻은 심오해서 처음 배우는 사람은 그 그윽한 뜻을 엿보기 어렵다네. 매월당 김시습도 오세암에서 『십현담』을 주해하였고, 나도 또한 오세암에서 그의 주해를 읽었네. 그 책을 사람들이 접한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그 뜻을 제대로 모른 듯해서 주석을 달아 그 뜻을 내가 풀어보았지. 그래 그 책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윤공: 「십현담」은 정편오위설(正偏五位說)을 의미 중심으로 노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 정편오위설에 대한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동오위설의 핵심이라 할 편(偏)과 정(正), 체(體)와 용(用)의 원리를 ‘편정양득(偏正兩得) 체용전창(體用全彰)’이라 표현하고 있으십니다. 그리고 조동오위 사상을 정확히 꿰뚫으시면서 화엄 사상까지 아우르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만해: 어렵네. 먹물 먹은 사람 냄새 풍기지 말고 대중이 알 수 있게 말해보게.
윤공: 스님은 현실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고, 중생을 제도해야 함을 제9위 ‘회기(廻機)’에서 “‘털 뒤집어쓰고 뿔 단’ 것은 소를 가리키고, ‘전(廛)’은 저자를 말한다. 이는 정위(正位)에도 거(居)하지 않고,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이른 것이니, 근기에 따라 중생을 접함은 그 응용의 방법이 따로 없다.”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류중행’은 ‘다른 생명들 속에서 행함’을 뜻하는데, 깨달음과 진리가 딴 곳에 있지 않고 윤회하는 현실 속에 존재함을 밝히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깨달은 자는 소도 되고 말도 되는 ‘피모대각(被毛戴角)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중생 교화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보살(菩薩)이 길이며, 『십현담주해』를 쓴 스님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리와 자성(自性)은 공한 것이고, 번뇌도 공적(空寂)한 것이다. 모든 것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는데, 망령되이 분별하기 때문에 깨달음과 미혹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허공과 같은 세계로되, 그 깨달음은 다른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편위에 존재하며, 깨달은 자는 그 편위 속에서 불성을 가진 중생을 교화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십현담주해』를 통해 밝히시고자 한 사상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만해: 옳거니.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내 창작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가?
윤공: 제가 보기에 『님의 침묵』에서 말하는 ‘님’은 절대적 진리를 표상하는 ‘공’이요 ‘정위’이면서, 그것이 구현된 존재인 ‘색’이요 ‘편위’ 자체가 아닙니까?
만해: 그렇지. 화엄사상의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를 보여주는 것이지. 「님의 얼골」이나 「알 수 없어요」가 보여주는 ‘님’이 바로 이러한 화엄사상을 보여주려 한 것이네. ‘님’은 하나이면서 여럿으로 나뉘어 나타나면서 화엄법계를 드러내지.
윤공: 하나이면서 여럿인 화엄 세계는 「하나가 되야주서요」와 같은 시에서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랴거든 마음을 가진 나한지(나와 함께) 가져서서요. 그리하여 나로 하야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서요.”와 같이 ‘님’과 ‘나’를 동일시하기에 이릅니다. 개체로서의 자아는 수많은 중생의 하나요, 중생은 부처요, 부처는 ‘님’이므로 ‘개아(個我)’는 ‘님’이 됩니다.
만해: 옳거니. 내가 일찍이 「나와 너」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지.
‘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면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도 없다.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갈꽃 위의 달빛이요, 달 아래의 갈꽃이다.
‘나’와 ‘다른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 연결되지. ‘나’와 ‘다른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없게 돼. ‘나’와 ‘다른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지. ‘갈꽃’과 ‘달빛’은 모두 흰색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지. 그러면서도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하나이면서 여럿이라는 점, 곧 ‘일즉다 다즉일’ 화엄적 세계지. 그와 같은 논리로 중생이 부처요, 중생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고, 그러한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참된 보살이라 생각한 거지.
윤공: 그런데 ‘님’으로 표상되는 공(空)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에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중생에게 존재하지요. 그러한 ‘중생즉부처’이며 ‘일즉다 다즉일’의 세계를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부처의 님’인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리성 속에서 중생 구제를 목표로 하는 대승불교, 곧 보살이 출현하고,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으로 시작하는 「나룻배와 行人」에서 ‘나’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으며 물을 건너는 중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알 수 없어요」에 등장하는 화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고 하여, ‘누구’라고 표상되는 중생을 지키는 등불, 곧 보살로서의 화자가 형상화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해: 자네 말이 맞네. 나에게 ‘님’은 일제치하라는 궁핍한 시대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으로 화하고, 그 중생의 고통과 시련은 ‘님의 침묵’, 또는 ‘님과 이별함’이라는 메타포로 나타났던 거야. 부처이자 중생인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능욕을 당하는 현실 아니었는가? 그래서 ‘님의 침묵’은 ‘떠나버린 님’으로 나타났던 거네. 정말 자네는 내 시 세계의 밑바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다양하게 느끼고 재미지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너무 불교사상에만 국한하여 설명하면 거부감이 들 거야.
자유와 평화
윤공: 스님께서는 늘 자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유정조(自由貞操)」라는 시를 보면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보다도 사랑입니다.…(중략)…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 / 나의 정조는 ‘자유정조’입니다.”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안병직 선생도 선생님의 사상을 일러 “자유의 개념은 한용운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자유를 인간 본질로 파악하고 있으며, 평등 평화 및 사회적 정의 개념도 이 자유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만해 한용운의 독립 사상』)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만해: 자유란 뭔가? 내가 남한테 침해를 받지 않고, 나도 남에게 침해를 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가? 일본이 우리 조선의 자유를 빼앗아간 상황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윤공: 선생님께서 서대문형무소에 계실 때 쓰신 「조선 독립 이유서」의 첫머리가 지금도 가슴을 울립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해골과 같고 평화가 없는 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라. 압박을 피하는 자의 주위의 공기는 분묘로 화하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지경[境涯]은 지옥이 되느니 우주의 이상적 최고 행복의 실재는 자유와 평화라. 고로 자유를 득하기 위하여는 생명을 홍모시(鴻毛視: 매우 가볍게 여김)하고 평화를 보하기 위하여는 희생을 감이상(甘飴嘗: 단 엿을 맛보듯)하느니 이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일지로다…….”
만해: 3.1운동 당시 감옥에 갇혔을 때 예심판사 나카지마 유조의 공판에서 구두로 답변하는 걸 손사래치고 글로써 답변한 것이네.
윤공: 당시만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개념이 기껏 해봐야 이광수의 자유연애론 정도가 있던 시절에 자유론을 펼치시면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밝히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즈음은 패권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분단된 우리나라에 대해 온갖 간섭을 하면서 자유를 옭죄는 상황이라 보입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스님.
만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지혜로워야 하네. 지혜가 없으면 억압과 굴종의 삶을 살아야 하네. 꽃은 비바람 맞고 아침 이슬 머금으며 자라는 것이네.
나는 꽃 수풀 속에서 깼다. 텅 빈 하늘을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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