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5월 16일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창비출판사)로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했다. 맨부커상은 1969년 영국의 부커사가 제정한 상으로, 영어권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맨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채식주의자’는 3부, 즉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채식주의자’는 주인공인 영혜의 육식 거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편 입장에서 서술되었으며, 제2부 ‘몽고반점’은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 입장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제3부 ‘나무 불꽃’은 남편과 여동생의 정사를 목격했으나 영혜를 돌보며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영혜의 언니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어 나약하고 소외자로 전락되면서 아버지의 힘에, 형부의 힘에 눌려 결국은 나약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없어 나무가 되고 싶었던 영혜⋯⋯ 결국 우리의 삶이 권력자나 권력적 재물에 눌려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영혜"와 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치는 것이 아닐까?
채식주의란 잘 알다시피 동물성 음식을 먹는 것을 피하고 식물로 만든 음식만을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주위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종교적 이유도 있을 것이며 건강상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에서 주인공 영혜는 어린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아버지가 끔찍하게 죽이던 기억이 뇌리에 각인된 채 무서운 꿈을 꾸게 되면서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주인공 영혜는 폭력에 대항해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육식은 욕망이고, 욕망은 폭력의 원천이며, 폭력은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에너지원이다. 한강은 영혜를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그래서 욕망과 폭력의 대상이 되고, 영혼이 파괴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렸다.
즉 ‘고기=육식=동물성=남성성=폭력=파괴’로 상징되며, ‘채소=채식=식물성=여성성=비폭력=구원’이 그 반대의 정점이다. 힘이 센 사람과 힘이 약한 사람이 동일한 공간에서 세상을 살아갈 경우 힘이 센 사람은 상대방의 의사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리되면 약자들은 생존이 어렵게 되는 것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 한강은 순수한 인간성을 지닌 무고한 인간이 포악해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봤다고 한다. 결국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차라리 나무가 되고 싶다고 영혜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바싹 마른 영혜에게 가족들이 육식을 권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에 대한 폭력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때리고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 넣는 것은 폭력 중에서도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해당할 것이며 결국 영혜는 저항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과도로 손목을 긋는 방법 밖에 더 없었을 것이다.
‘몽고반점’에서 형부에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은 또 하나의 폭력 앞에서 자신을 지켜낼 기운조차도 없는 현실, 마지막의 ‘나무불꽃’에서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병원을 뛰쳐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리가 들렸어.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간 것뿐이야⋯⋯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거기 서서 기다린 것뿐이야.
뭘 기다렸다는 거야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스스로 거꾸로 돋아나려는 영혜, 지금 우리의 주위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이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접수에 의하면 사망자가 최대 239명, 심각한 폐질환 형태로 발현된 것이 최대 1528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라고 한다(나무위키, 인터넷).
가해자인 회사는 살균제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을 개발허가를 받아 판매하여 이익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자신들의 이익을 누리면서 호화로운 육식(肉食)을 누리는 동안에 신체적으로 약자인 산모와 영유아들은 원인을 모르고 죽어갔다.
국민들은 과학적 지식이 없거나 부족하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에서 승인한 제품이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당연”한 것을 믿었으나 마치 포식자와 같은 강자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든 듯이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무기력하게 쓰러진 그들을 누가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인가?
최소한의 희망인 “소리”라도 들려주던지 아니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장”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정상”이라는 판단 하나로 모든 것을 외면하거나 나머지를 “비정상”이라 매도하면서 순응(順應)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국가의 손길이 더욱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가족들이 살려달라는 “몸짓”을 잘 보듬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에게 희망의 소리를 들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땅속”으로 보내서는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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