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es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 2014-08-12 16:36:29
140812_67_83 Aristoteles의 철학은 윤리학, 논리학, 미학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는 Aristoteles의 설득의 3요소와 개인 발달의 요소를 살펴봄으로써 대인관계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설득의 요소가 무엇이고 인격적 발달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설득의 3요소는 ethos(인간의 습관적인 성격), pathos(격정, 영정, 노여움 따위의 일시적인 정념의 작용), logos(모든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보편적 원리)이다.  에토스(ethos)는 권위적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명성과 신뢰감을 드러내고 상대방으로서 호감을 유발시키는 설득에 해당된다. 자신의 말속에 자신의 인격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즉 말이 곧 인격이 되는 것이다. 요즘 막말 정치인, 연예인... 개념(concept)없는 사람들이다. 그네들의 말속에서 그들의 인격이 드러난다.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bt das haus des seims)"라는 말을 한다. 즉 언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실존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언어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속에는 인격이 들어있다. 내가 쓰는 언어는 곧 ‘나’임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에게 막말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무 개념적 행동은 Internet에 악의적인 댓글(악플)을 다는것과 같다. 무개념적 언어는 Vygotsky라는 사람에 따르면 젖먹이의 언어이다. 유치하다. 자신의 지위와 명성으로 상대방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언어사용은 상징적폭력(Bourdieu)이나 마찬가지이다. 국회청문회를 봐라. 청문(聽聞)은 귀를 열고 듣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들어 주기커녕은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질타를 한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하냐면서 나이든 관료에게 혼을 내기도 한다. 에토스적 설득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파토스(pathos: 영어의 발음에 따라 ‘페이소스’라고도 함)는 감성적 상태를 나타낸다. 넓은 의미에서 어떤 사물이 받게 되는 변화의 상태라면 좁은 의미에서의 파토스는 외부로부터 받아 생겨난 인간의 감정의 상태이다. 파토스는 영화, 문학등의 예술적 장르에서 사용했던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었다. 파토스는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눈물의 효과’가 설득하는 과정에서 크게 나타난다. 이는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여 설득하는 것으로 연인들 사이에서 훌륭하게 먹히는 설득의 방법일 것이다. 여자들은 관계지향적 사고를 하고 사랑, 배려, 보살핌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파토스적 설득이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로고스(logos)는 이성적 상태를 의미한다.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 법칙이나 행위에 따라야할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을 잘 활용하는 설득이다. 설득할 때 필요한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행하여 지는 경우를 말한다. 철학적으로 logos 중심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post-modernism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철학적 접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설득의 기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권위에 의존하여 설득하는 것도 아니고 감정에 호소하여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논리(logos)에 의한 설득이 참된 설득이다. 설득이란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는 것인데 에토스에의한 설득은  권위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요’에 해당된다. 이는 교화(indoctrination), 즉 세뇌시키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류의 설득은 강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형태에서 효과가 있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아버지가 휘두르는 무서운 설득이다.  감정에 호소하여 설득하는 파토스는 오류에 사로 잡힐 수 있다. 이는 합리적인 근거가 결여된 설득이다.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여 설득하는 오류이다. 청문회 스타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분의 설득에 환호하는 이유는 매우 논리적인 설득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논지의 모순점을 논리적인 논박(dispute)을 통해 상대방 스스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논리성을 logos적 설득이라고 한다.
 Aristoteles는 logos를 매우 중시하여 logos(이성)의 훈련을 하면 중용을 지키게 되어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Aristoteles의 개인의 발달 단계를 보면 신체적 성장의 단계 다음에 영혼의 비이성적인 욕망이 들어나는 시기를 거쳐 이성적으로 사고 할 수 있는 시기의 단계롤 발달해 간다고 본다. Aristoteles는 자연, 습관, 이성의 3육론을 주장한다. 영혼의 단계도 식물 영혼에서 동물 영혼으로 이어 이성적 영혼에로의 발전을 추구한다.
식물영혼이란 단순히 살아있음의 행위만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식물인간이라고 할 때 ‘생물학적인 유기체의 살아있음’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물국회, 식물인간 등의 용어로 사용된다.
동물영혼은 ‘살아있음+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동물적 영혼을 갖은 인간은 살아있음은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에 감각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성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식물영혼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동물영혼은 감각적 행위를 한다. 우리는 유명한 남자 아이돌(idol)을 ‘짐승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네들은 공연을 하는 중에 윗통을 주로 벗고 씩씩거린다. ‘짐승돌’은 욕이다. 그네들은 비하하는 용어이다. 일반인도 동물적 영혼의 단계에 있다면 본능에 충실하고 신체적 욕구나 욕망에 충실할 것이다. 따라서 자제력이 부족하고 즉각적인 충동이나 쾌락에 만족하는 Id(원초아)적 인간이 된다.
 이성적 영혼을 ‘인간적 영혼’이라고 한다. 이성적 영혼의 발휘는 참된 인간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이성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것이 이성적 영혼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이성적 영혼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살인범이나 강간범 등은 사람일 수 없다. 공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에 따르면 인간답지 않은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Aristoteles에 따르자면 인간의 영혼과 신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이점이 platon의 이원론과 다르다) 따라서 이성적 영혼을 갖고있지 못한 신체는 당연히 이성적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건전한 신체속에 건전한 영혼(A sound mind in a sound body)”을 주장하는 것도 일원론적이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건전한 영혼속에 건전한 신체”(A sound body in a sound mind)가 된다. 건강한 영혼을 갖은 자는 사회적 규범에 맞게 행동을 한다. 즉 “마약이 나쁘고 음주운전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등의 준칙에 따라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체는 건강한 것이 된다. 육체에 병이 들었을 때 healing(치유)를 한다. 이때 치유의 유(癒)를 보면 마음(心)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몸의 병을 고칠 때 우선해야 할 일이 마음을 건전하게 갖는 것이다. 긍정적인 정신(mind)을 갖고 있을 때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병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병의 근원도 stress가 아닌가?
 Aristoteles의 영혼론(『De Animas』)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해주는 행복지표이다. 인간적 영혼의 올바른 활용은 막막을 하여 한순간 불행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어 행복(eudaimonia)을 향유하게 하는 것이다. Aristoteles의 궁극적 목적(telos)은 이성(logos)도야를 통한 행복실현에 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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