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3.15부정선거-역사상 최고 악랄한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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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남 교수 |
당시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 약 500만표, 조봉암 후보 약 220만표, 선거유세 중 사망한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표 약 185만표라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의 3대 대선에서 드러낸 불쾌한 감정에 대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가 1955년부터 ‘이승만 숭배 운동’ 비슷한 것이 일어났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자면, 3대 대선을 전후해서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이승만 버프’가 일어났지만 그 버프가 압도적이지 못한 투표결과가 나오자, 당시 자유당 정권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대 대선이 치러지기 2년 전인 1954년 9월 18일에는 교통부 청사 앞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고, 1956년에는 파고다 공원과 남산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당시 건립 중이던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별칭을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회관이라 불렀고, 부산 용두산공원의 이름을 아예 우남공원으로 바꿀 정도로 초대 대통령 국부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은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기 바빴던 자유당과 아첨꾼들은 3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되는 처지가 되었다. 3대 대선이 끝난 후 바로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에서 자유당은 47석 중 1석만을 차지하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죽여버리고,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폐간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민주당이 4대 대선의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최인규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최전선에는 항상 최인규가 있었다. 그는 내무부장관 취임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는 전국 시, 읍, 면, 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1회씩 모여 득표공작을 점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며 지방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선거법적 차원에서 명백한 위법행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다음은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지방순회시 직접 지시한 부정선거 행동지침이었다.
1. 4할 사전투표: 선거 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2.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미리 계획한 3인, 5인 별로 각 조장의 확인 하에 투표를 하게 하고, 자유당 선거위원들에게 보여준 뒤 투표함에 넣게 한다.
3.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투표소에 배치하여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자유당 소속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4: 야당 참관인 퇴출전략: 민주당 소속 참관인을 금전으로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하게 하거나,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구실을 붙여 참관인 자격을 박탈시킨다.
이처럼 자유당 정권은 미리 정부통령 선거에서 주도면밀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농번기인 5월을 피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야당 유력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선거일을 3월 15일로 급히 변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이기붕 후보는 민주당 장면 후보에게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권한대행이 아니라, 바로 차기 대통령이 되는 규정을 두고 있었기에, 무슨 수를 써더라도 장면이 부통령으로 재선되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만 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당시 국가예산 중 80억 환을 부정선거 자금으로 전용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드디어 3월 15일 부정선거가 끝난 뒤, 개표를 할 때에도, 밤에 몰래 잠입하여 투표함을 바꿔치기 한다든지, 아니면 돈으로 매수된 검표원이 지장 전체를 피아노 건반을 치듯이 모두 자유당 후보에게 찍어주고 난 뒤에 검표하는 등 최악의 부정개표행위를 저지르고 말았다.
결과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의 득표율이 99%를 기록하였고, 이는 가장 먼저 마산시민들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이 발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본인과 이기붕 일가 및 자유당 정권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3.15 부정선거는 헌정사상 최초 공식적으로 인정된 부정선거였으며, 대한민국 선거민주주의의 최악의 현주소를 세계만방에 알려버린 사상 초유의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김형남 교수
캘리포니아 센트럴 대학교, 단국대, 경성대 법대 교수 | 법학박사 | 미국 워싱턴 주 변호사 | 세계헌법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 성균관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위원 | 15년간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 사법시험 제1차시험 출제위원, 제2차시험 출제위원, 제3차 면접위원 | 15년간 행정안전부 국가고시센터 출제위원, 선정위원 및 면접위원 (행정고시, 5급 승진시험, 국가직 7급·9급, 지방직 7급·9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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