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호 변호사의 법조단상] 국가폭력의 성찰과 실질적 법치주의: 진실화해위원회의 헌법적 책무

피앤피뉴스

gosiweek@gmail.com | 2026-08-07 11:27:49

국가폭력의 성찰과 실질적 법치주의

: 진실화해위원회의 헌법적 책무





 

▲최창호 변호사

1. 개관

역사는 흔히 정의의 기록이라 불리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이 개인의 삶을 짓밟았던 침묵의 비극이 숨어 있다. 국가가 보유한 물리력과 공권력이 적법절차와 헌법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때, 이를 우리는 ‘국가폭력’이라 부른다. 즉 국가폭력이란 국가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일컫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압도적인 조직력을 가진 국가기구와 무력한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이 불균형성은 정당한 공무 집행이나 안보라는 명분 아래 손쉽게 은폐되어 온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다. 

 


2. 국가의 본질과 통치권의 헌법적 한계

국가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로크와 루소 등의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위험과 불안을 극복하고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계약으로 성립된 것이 국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는 존재 이유 그 자체로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할 의무를 진다.

만약 국가가 도리어 권력을 남용해 국민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이는 국가 성립의 근본적 계약을 위반한 것이며 통치권의 정당성을 스스로 상실하는 행위다. 국가를 단지 물리적 강제력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실력설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헌법적 관점에서 국가의 정당성은 오직 기본권 보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만 인정된다.


3. 국가범죄에 대한 소멸시효 항변과 실질적 정의

그러나 과거의 그늘에서 자란 공권력의 과오는 오랫동안 법의 이름으로 방어되어 왔다. 국가범죄로 인한 피해자들이 뒤늦게 권리를 주장할 때, 국가는 소멸시효 항변을 하곤 한다.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멸시효의 취지를 국가범죄에까지 경직되게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스스로 불법과 은폐를 저질러 피해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놓고,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엄연한 권리남용이라는 것이다. 반인권적 국가범죄와 조직적 공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소멸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적어도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을 권리남용으로 배척하는 것이 실질적 정의와 적법절차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4. 법률만능주의 극복과 실질적 법치주의의 확립

우리는 오랫동안 '법률의 형식을 갖추기만 하면 내용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법'이라는 형식적 법치주의, 즉 법률만능주의의 폐해를 목도했다. 과거 유신헌법이나 각종 비상조치처럼 법의 탈을 쓰고 단행된 국가폭력은 법률만능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지점을 보여준다.

법률은 단순한 통치 수단이 아니다. 모든 법률과 공권력 행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철저히 구속되어야 하며, 내용적 정당성을 갖춘 실질적 법치주의만이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는 유일한 보증수표라 할 것이다.


5. 불법행위의 특수성과 소멸시효 배제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중에는 불법행위의 특수성 이론에 의하여 소멸시효를 배제하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대판 1996. 12. 19. 94다22927 전합).
“국가 소속의 공무원이 통상적인 공무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저지르게 된 일반적인 불법행위가 아니고, 그 당시의 비상한 시기에 국가에 의하여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실시된 삼청교육 과정에서 피고 소속 공무원들이 대량으로 저지르게 된 특수한 불법행위의 경우이므로,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여 국민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며 국민으로 하여금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여야 할 임무가 있는 피고 국가로서는, 위 삼청교육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국민들에 대하여 정정당당하게 그러한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피고의 소멸시효항변은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대법관 천경송, 대법관 정귀호, 대법관 이용훈, 대법관 이임수의 반대의견 중).”


6.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과 헌법적 소명

이러한 맥락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역할과 책무는 매우 엄중하다. 진화위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조사하는 기구가 아니다. 은폐되었던 국가폭력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규명하여 피해자와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한다. 나아가 진화위의 진실규명 결정은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하거나 손해배상을 받을 때 '권리 행사의 객관적 장애'를 해소해 주는 법적·실질적 토대가 된다.

국가가 과거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할 때 비로소 참된 사회적 화해와 통합이 시작된다. 법률만능주의와 공권력 남용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잊혀진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이 땅에 실질적 법치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시대적 소명이라 할 것이다.

최창호 변호사
서울대 사법학과 학·석사 출신으로 1989년 3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군법무관을 거쳐 1995년에 검사로 임용되어 공안, 기획, 특수, 강력, 의료, 식품, 환경, 외국인범죄, 산업안전, 명예훼손, 지적재산, 감찰, 송무, 공판 등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고,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헌법재판을 경험한 후 법무부 국가송무과장으로 대한민국 정부 관련 국가 송무를 총괄하면서 주요 헌법재판, 행정재판 및 국가소송 사건을 통할하고, 정부법무공단의 발족에 기여했다. 미국과의 SOFA 협상에 참여한 바 있으며, 항고, 재기수사명령 등 고검 사건과 중요경제범죄 등 다수의 사건을 처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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