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근무”
김 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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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친구 과장을 실망시키기가 난처하면서 반대의 경우도 개운치 않았습니다. 전자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짙었지요. 그가 소위 S그룹 비서실 출신의 엘리트인 반면, 승선 전 3년간의 부산지점 근무가 전부인 나의 사무실 경력이 빈약했거든요.
궁지를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발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임 당초의 내 작심과도 상통하는 일이었지요. 항해사인 나의 육상근무는 세상과 해운실무의 경험을 위한 것이어서 직급이나 급료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속다짐이었으니까요.
결심을 털어놓았습니다. 해양대학을 나와서 해무나 공무 등 기술부서가 제격인 나보다는 명문대 상경계열 출신의 김 과장이 먼저 진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영업부서 간부직에 나 같은 소위 해기사(海技士) 출신이 드물기도 했고요. 그러자, 김 과장이 맞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해양대학 출신에 선장 경력까지 갖춘 나야말로 해운의 정통이므로 우선 진급해야 한다면서.
부장이 두 사람을 불러 앉히고는 되잖은 말장난으로 자신을 놀린다면서 호통 쳤습니다. 한 사람씩 따로 불러서 진정 상대방의 진급을 원하느냐고 닦달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말씀드렸지요. 앞날이 창창한 동료끼리 서로 밀치며 나서려고 해서야 되겠느냐고. 그때 김 과장은 어쨌는지 몰라도, 서로 진급하지 않겠다는 우리 부서의 소문이 퍼지면서 그와 내가 함께 승진하는 사내 초유의 발령이었습니다.
40여 부원들의 회식자리에서 내가 그의 손을 끌어 잡았습니다. “축하해.” 그가 받았습니다. “서로 축하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때 나로서는 닿지 않는 포도가 신맛일 거라면서 돌아서는 여우의 잔머리였던 지요. 그런 내게 당하지 않겠다는 태양체질 김 과장의 오기였고요. 그렇게 지나온 육상근무의 한 고비였습니다. 그래도 그해 겨울 소위 룸살롱마다 울려 퍼지던 고음 여자 가수의 ‘J에게’, 남자 저음의 ‘가을비 우산 속’이 그와 나의 세모를 부풀렸고요.
부장으로 진급하고 서너 해가 됐을 때였습니다. 극심한 해운불황의 여파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부서마다 두 사람씩 감원 명단을 적어내라는 지시였습니다. 또 한 번 육상근무의 비애였지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봐도 묘책이 없었습니다. 명단제출을 닦달하는 상무이사와 마주앉는 수밖에요.
여리고 착한 부하들을 일도 없이 쫓아내자고 이름이나 적어내는 따위의 부장노릇은 할 수 없다는 반발이었지요. 의당 상무이사의 노발대발이었고요. 그런 며칠 후에 그가 내게 제안했습니다. 자신이 나 대신 고를 테니 동의하겠느냐고.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임원이니 그럴 수 있지만, 반드시 나를 포함시키라는 치례 말고는요.
여직원과 함께 명단에 오른 과장대리 부부가 퇴근 후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첫 아이 산달이 내일모렌데 의료보험이 끊기면 큰일이라고 막무가내 읍소였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못지않은 직장을 책임지겠다는 호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요. 그렇게 될 때까지는 내 봉급의 절반을 할애하겠다는 언약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자, 일언반구 가담 없는 내 아내에게 보증이라도 서라는 듯 간곡한 눈길을 보내면서 일어서더군요.
마침 대학 선배가 부사장으로 있는 해운관련 대기업에 그만한 자리가 있어서 그의 의료보험은 실수 없이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과장 직책의 봉급도 이전보다 한결 높았고요. 그렇게 또 한 번 육상근무의 고비였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환송 회식에서 그와 잔류 직원들 사이의 우의만을 당부하는 곤혹이었고요.
어느새 한 해를 지낸 설 연휴 때였습니다. 한복차림의 그들 부부가 갓난아기를 안고 찾아왔습니다. 그와 나의 내외가 맞절세배를 하면서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그때 그들 내외를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더구나 이번 감원인사에 우리 부서의 해당자가 없었음을 축하한다는 인사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로서는 부하들의 희생을 막지도 못 하면서 악역을 피하려고 비겁했던 것인지요. 나의 당돌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상무이사 또한 진퇴양난의 비애였을 겁니다. 전 지구가 겪고 있는 해운불황의 파고를 그런 미봉으로 타넘을 이치는 아니었지요. 신참 직원 두 명보다는 부장인 내가, 나보다는 상무이사 당신의 사퇴가 훨씬 합당하다는 이치는 누가 봐도 번했을 테니까요. 어렵고 어둡던 시절, 은행이 대출 명분으로 요구하는, 소위 차입회사의 자구책이었습니다.
렌, 그렇게 간댕간댕 이어지는 서울살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땅 위의 안일에 젖어든 것이지요. 국내 최대 선박회사의 영업부장이라는 관록과 평판에 도취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간간, 다람쥐 쳇바퀴를 닮은 직장생활에의 회의가 밀려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또 육상근무의 편을 들고 나섰고요.
막내의 마지막 학기 등록이 사무실 근무의 마침표가 되리라는 절충이었습니다. 그간 바다와 땅을 두 번씩 오가면서 이어져 온 삶의 다음 순번은 조급할 것 없는 시간의 여유로운 항해가 되리라 했습니다. 이제는 집안일을 손 놓아도 될 아내와 함께 나설 작정이었거든요. 모처럼 남이 해주는 삼시세끼로 지구촌을 항해하고 여행하면서 아내도 기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선장의 정년이 차거나, 그 이전이라도 역마살이 도지게 되면 고향 언저리의 산수 전원이 여생의 제격이겠고요.
그러자, 배산임수 양지받이의 마당 넓은 한옥이 한 채 그려졌습니다. 마당가에 두레박 우물을 파고 우물곁에 살구나무를 심으면, 꽃 더미로 몰려드는 벌 떼들의 합창이 봄갈이로 혼곤한 내 새벽잠을 깨워 주리라는 설계와 함께 말이지요.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정한 기일에 육상근무를 접겠다는 작심이 도리어 가끔씩 뜨악해지는 그것을 다독이고 감쳐드는 역설 말이지요. 우리네 세상살이도 상당부분 조삼모사(朝三暮四)의 환시 같은 것인지요. 그냥 한 판 소꿉놀이에 흡사하기도 하고요.
렌, 또 한 번 허튼소리였습니다. 미래로 가득하던 젊음에서 과거만 남은 나이로 허약해지면 누구라도 빈 소리를 반복하게 된다더군요. 외로워서일 것도 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누가 뭐래든 나로서는 괜찮습니다. 그대를 향한 어릿광대만으로도 고맙고 행복하거든요. 그러고 참, 육상근무란 말이 생소했겠네요. 우리네 항해사 같은 바다 사내들의 사무실 근무를 그렇게 부른답니다. 내내 건안하소서.
김문호
한국해양대 졸업
대한해운공사 선장
한일상선회장
한국문협 해양문학 연구위원장
수필집 '윌리윌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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