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 에세이] 대모산신령

피앤피뉴스 / 2025-12-10 10:47:38
“대모산신령”

 

김문호

 


중학교 2학년 봄, 말본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새벽 산행의 꼴통 버릇에는 비라도 내리는 날이 더욱 좋았습니다. 우산 한 장을 펼쳐 들고 나서면 온 산이 독차지였거든요. 인적 없는 새벽 산이 혼자서 눈비에 젖는 모습은 언제 봐도 새로운 장관이었습니다. 안개에 건들바람까지 어우러지면 혼자 보기가 애석하면서 도리어 외로워지는 비경이었고요. 그야말로 선경인들 이에 더할는지요.

그날도 대모산을 독차지하면서 구룡천 약수터 쪽으로 하산하던 참이었습니다. 황토물이 콸콸 흐르는 개울 너머 논바닥의 노인 한 분이 물꼬를 보는 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새벽안개 속에서 도롱이, 삿갓 차림에 물 괭이 긴 자루를 낚싯대처럼 비켜 멘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였습니다. 서로 알아볼 만한 거리에서 나도 몰래 소리쳤지요.

“경치 좋습니다!”
그림 속의 노인이 삿갓을 올려 쓰고 돌아서면서 받으시더군요.
“젊은이답지 않게 무슨 소리여? 농사꾼 영감탱이 뭐가 좋다고”
“어릴 적 고향집의 조부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산중턱의 묵 밭뙈기 150여 평이 내게 떨어졌습니다.
“누가 물으면 해마다 콩 대두 한 말씩을 강 목사한테 준다고 하란 말이여.”

양재대로가 없던 개포동 쪽 대모산자락에 임시 건물 개척교회를 짓고 이삼십 신도들과 함께 기거하던 목사님이었습니다.

회사의 부하직원 대여섯이 적극 찬동하면서 반공일 오후를 보탰지만, 산중묵밭의 잡초 사리가 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새벽 산행과 일요일이 몽땅 투입될 밖에요. 그야말로 도연명의 전원시(田園詩) 구절들이었습니다.

남산 기슭에 콩 씨를 심었더니 (種豆南山下)
잡초만 무성할 뿐 콩 싹이 드물어(草盛豆苗稀)
새벽부터 올라가서 김을 매고는 (侵晨理荒穢)
달빛 속에 호미를 메고 내려온다.(帶月荷鋤歸)
길은 좁은데다 풀 나무는 웃자라 (道陜草木長)
초저녁 이슬이 내 옷깃을 적시네.(夕露霑我衣)

한낮에는 웃통을 벗어재끼는 탓에 밀짚모자를 더욱 눌러쓰지만 거래처며 해운계의 지인들이 지나치다가 되돌아와서 나를 확인하면서 대모산신령이라는 별명이 퍼졌습니다. 국내 최대 해운회사의 외항선 선장에서 본사 영업부장으로 탈바꿈하더니 급기야 산신령이 됐다면서 말입니다. 그때 대치동에는 해운회사와 종합상사 임직원, 소위 수출입국의 역군들이 유독 많이 살았거든요. 성당 골목 초입의 심야 주점 ‘런던’은 새벽 귀가가 일상인 그들의 마지막 입가심 아지트였고요.

지금은 용인의 산자락으로 와 있습니다. 대치동 청실아파트가 재건축되면서였지요. 먼저 이주한 이웃들을 따라왔다가 그대로 주저앉은 겁니다. 그새 인천에 사무실을 내면서 독립(?)한 나로서는 출퇴근이 보다 편하기도 했고요.

강남을 예찬하라는 명제에 되돌아봐도 별로 짚이는 것이 없네요. 지금껏 내 삶의 가운데 토막 30여 년을 강남에서 지내고도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단 하나, 인천의 사무실을 후진에게 넘기면서 한가한 지금은 농사가 주업이라는 겁니다. 150여 리 상거에 대모산시절만 한 평수의 밭농삽니다. 이 또한 묵밭으로 넘겨받아 개간한 것이고요. 달라진 것은 길 숲의 새벽이슬이 옷깃을 적시던 산길 대신 새벽안개 속의 일출이 노안의 시력을 훼방하는 고속도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그때는 젊고 패기에 찬 부원들이 함께였지만 지금은 변두리로 물러나 앉아서 젊지 않은 나 혼자라는 것이지요.

아내 또한 영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매월 한 번씩은 강남을 다녀오거든요. ‘청산회’라 합니다. 지난 한때, 아파트 주부들이 청실산악회를 만들었다면서 아내가 나를 놀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의 산행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더구나 주부들이 배낭을 메고 산길에 나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망측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가장의 권위로 말리지 못한 채, 전통 혼례의 용어인 청실과 산악회가 어울리지 않으니 그냥 청산회가 좋겠다면서 도리어 거들던 기억이 지금에도 씁쓸하네요.

놀랍게도 청산회에는 여태 한 사람의 결원도 없답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용인과 강남 중간쯤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고만한 회비로 점심과 오후 내내 수다를 보장받을 장소가 없는 것인지요. 시쳇말로 채팅이지요. 참새나 제비들이 전깃줄에 늘어앉아서 줄 아래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마냥 재잘대듯 말입니다.

렌, 여자들은 나이 들수록 더욱 왕성한 구심력으로 뭉치는데 남자들은 저마다의 원심력으로 산지사방 흩어지는 것이 천생의 이치인지요. 그러면서도 거쳐 온 시간과 장소에 사뭇 무관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여류 시인의 구절,
“천리타향 객지에서
가랑잎 하나 줍고” 만큼이라도 말입니다.

시절이며 풍습이 무지막지 바뀌듯, 더워도 너무 덥네요. 염량이 처처동이라 했으니 그곳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그래도 뜰 앞 산자락의 매미들이 저리도 울어쌓으니 가을도 정녕 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잠시 감내하시고 이 가을에도 건안하소서.

 

김문호
한국해양대 졸업
대한해운공사 선장
한일상선회장
한국문협 해양문학 연구위원장
수필집 '윌리윌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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