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則天武后) - 정승열 법무사
| 2016-01-12 14:31:00
정신없이 살다가 모처럼 TV채널을 돌리던 중 모 케이블방송에서 방영하는 [여황제 무측천]이란 중국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지난 2010년에도 방영했다고 하니 그동안 몇 번이나 재방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매번 우연히(?) 그것도 중간에서부터 시청하게 되어서 전후를 상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중국역사를 공부한다는 생각에서 흥미 있게 시청하고 있다.
당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인 고종의 황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중국에서는 패륜적인 여자라고 하지만, 그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여서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등 크게 엇갈린다. 우리에게 측천무후로 알려진 그녀는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고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게 되었고. 아무튼 태종이 집권하던 624년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무사확(武士彠)과 후처 양씨(梁氏) 사이의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녀의 아명은 미랑(媚娘), 이름을 무조(武照)다. 아버지 무사확은 수양제(양광)때 토목공사로 거부가 되었으나, 617년 수양제의 폭정에 태원유수 이연(李淵)과 함께 반란에 가담하여 후에 당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 작위를 받은 고관이었다.
태종은 황후 장손씨가 죽자 그 이듬해인 636년 용모가 아름다운 14살의 무조를 재인(才人)으로 삼았지만, 무조는 애교가 없어서 태종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태종의 아들 고종과의 혼인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잘 믿기지 않고, 그녀는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649년 태종이 죽자 선제의 후궁은 순장하거나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당시의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감업사 비구니가 되었는데, 태종의 9남으로서 황제가 된 고종(李治; 628~683, 재위기간 649~ 689)은 분향을 구실로 감업사를 자주 방문하더니 마침내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고종의 황후인 왕씨가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숙비를 질시하여 고종의 마음을 돌리도록 무조를 불러들였다고도 한다.
아무튼 궁중으로 돌아온 무조는 처음에는 황후 왕씨와 결탁해서 소숙비를 폐출시키더니, 점점 야욕이 커져 황후 왕씨도 몰아냈다. 무조는 654년 10월 자신이 낳은 딸을 황후 왕씨가 보고 돌아가자 아기를 목 졸라 죽인 뒤,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가 아기를 보러 왔다가 죽은 것을 알게 된 고종에게 황후의 소행이라고 모함하여 황후 왕씨를 폐서인시킨 뒤 황후가 되었다. 그 후에도 폐황후 왕씨와 소숙비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서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게 했다. 고종은 무씨를 소의(昭儀)로 승격시켰다가 마침내 황후로 삼고, 고종과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다.
그녀는 고종의 외숙부이자 승상 장손무기를 자살하도록 강요하는 등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키고, 656년에는 왕황후가 낳은 황태자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워 폐위시키는 등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친 뒤 자신이 낳은 아들 이홍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런 그녀의 전횡을 보다 못한 고종이 대신들과 은밀히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기도 했지만, 심복들의 밀고로 그 사실을 안 무씨는 대신들이 폐황태자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고 했다는 이유로 처형시키고, 검주로 귀양 보냈던 이충에게는 664년 사약을 보냈다. 하지만, 무조는 정치적 능력이 대단해서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리니 고종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중병에 걸려 누워있는 동안 실질적인 통치자로 나서기도 했다. 이 시기는 나당연합군이 백제(660~663)와 고구려를(678) 멸망시키던 때였다.
675년 고종이 신하들의 신임이 두터운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무시는 이에 반대하여 독약을 보내 죽였으며, 둘째왕자인 이현(李賢) 역시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였으나 680년 여색을 밝힌다는 이유로 폐출시킨 뒤 684년 자객을 보내 죽였다. 그리고 형들과 달리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하는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3년 뒤인 683년 고종이 56세로 죽자 황제에 오른 중종이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켜 무후의 독재에 항의하며 장안으로 쳐들어왔으나, 무후는 40일 만에 반란을 평정했다.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는 중종이 고종만큼 나약하고 무능한 것을 알고 직접 정치에 간여하려고 하자, 무후는 위 황후와 그의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한다는 이유로 중종을 폐위하여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막내아들 예왕단(豫王旦)을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모든 실권을 장악한 무후는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여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고 쓰인 돌을 무씨에게 바치자 이것을 보고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그러자 중국 남부에서 당 왕조를 지지하는 고조의 11남 한왕 이원가를 비롯한 세력과 젊은 관리들이 무후에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하고, 6년 뒤인 690년 9월 9일 중양절을 기하여 65세의 무후는 예종을 폐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무후는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수(天授),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자신을 측천 금륜대성신황제(則天 金輪大聖神皇帝)라고 했지만,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주나라를 이전의 서주․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 무씨를 따서 ‘무주(武周)’라고 불렀다.
이후 705년 그의 나이 82세로 죽을 때까지 중국은 16년 동안 유일무이한 여황제 치세가 전개되었다. 황제가 된 무씨는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했으며, 국법을 더욱 엄격히 했다. 반면에 아직 정착되지 않던 과거제도도 회시, 공사, 전시로 정리하여 많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등용시키고, 이들을 많이 중용하여 지지기반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훗날 현종(李隆基)을 도와서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했다. 또, 불교를 중흥시켜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시키기도 했는데, 역사가들은 이때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한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무씨는 조카 무승사의 뛰어난 정치역량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무가(武家) 일족들이 이미 무씨의 나라이니 이가(李家)들이 세운 당 왕조 대신 무씨의 후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도록 하는 요구를 거절하고, 698년 적인걸 등 측근들의 간언에 따라서 유배된 여릉왕 이현(중종)을 다시 태자로 책봉했다.
이처럼 황위계승에 자신의 가문이나 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다가 6년 뒤인 705년 중병에 걸렸을 때 재상 장간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양위를 강요하니 15년 만에 중종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과 막내아들 이단(예종),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서 자신이 죽은 뒤에는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고, 자신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은 폐황후 왕씨 일가를 복권하라고 유언한 뒤 82세로 죽는다.
무후가 시행한 여러 정책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데, 그녀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당 태종의 ‘정관의 치’이후 가장 성공한 정치인 현종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군사·정치실력에 의한 귀족계층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사대부 출신의 문인 관료가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했다. 독재가 통하던 왕조시대라곤 해도 무난히 통치에 성공하다가 죽은 그녀의 일생은 과연 성공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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