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홍유릉서 의친왕 서거 70주기 기신제향 봉행

마성배 기자

gosiweek@gmail.com | 2025-08-18 12:15:44

대한제국 황족·독립운동가 의친왕 이강 추모…사동궁 복원 필요성 재조명 ▲제70주기 의친왕 기신제향 후 의친왕 후손들과 참반객들이 대한독립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피앤피뉴스=마성배 기자] 광복 80주년을 맞은 8월 15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에서 대한제국 황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의친왕 이강의 서거 70주기를 기리는 기신제향이 궁중 예법에 따라 성대히 봉행됐다.

이날 제향에는 초헌관으로 의친왕의 장손 이준 황손, 아헌관으로 연안김씨 대종회 김사권 회장, 종헌관으로 세종대왕 사가독서 이찬희 이사장, 그리고 고종황제의 후손 20여 명이 제관으로 참여해 예를 올렸다. 오전 10시 30분, 영원 재실에 모인 사동궁 후손, 사육신·생육신 후예, 연안김씨·여흥민씨 후손 등 300여 명의 참석자들은 묘역까지 산릉행렬을 이어가며 엄숙히 참배했으며, 제향 후에는 인근에서 오찬을 나누며 의친왕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조선 왕릉 40기는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500년 왕조의 무덤이 온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 것이다. 이번 제향을 계기로 홍유릉 내 의친왕 묘 역시 세계유산 등재 재추진 필요성이 제기됐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둘째 아들 이강을 의친왕에 봉했다. 그는 일본 유학과 미국 로녹대학 수학을 거치며 김규식·안창호 등과 교류했고, 귀국 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과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내며 군 통솔과 서양의학 도입을 주도했다. 동시에 사동궁을 독립운동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1912년 건립한 봉황각은 훗날 3·1운동의 발상지가 됐다.

1919년 고종 독살설이 퍼지자 그는 독립신문에 친필 성명을 발표하며 “조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위한 투쟁”을 선언했다. 또한 “차라리 자유 한국의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황족이 되지 않겠다”는 편지를 임시정부에 보냈고, 대동단의 명예 총재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도 힘썼다.

일제는 항일 의지가 강한 의친왕을 배제하고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지명해 일본으로 볼모로 끌고 갔다. 해방 후 의친왕은 황통 복귀 요구를 거절하며 민주주의 체제를 존중했고, 생활고 속에서도 독립운동가 예우와 기록 보존에 힘썼다. 1955년 서거 후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1996년 홍유릉으로 이장되어 현재 고종,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 안장돼 있다.

다른 왕릉과 달리 의친왕 묘는 봉분만 남아 있어 역사적 재조명과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의친왕 기신제향은 제수 음식 준비와 손님 맞이까지 황실 후손들이 직접 맡아 진행하는 유일한 제향이다.

의친왕이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사동궁은 광복 이후 민간에 매각돼 지금은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마지막 건물마저 2005년 인사동 공영주차장으로 변했으며,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할 때 복원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날 의친왕의 장손 이준 황손은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사는 철저히 지워지고 잊혀졌다”며 “광복 80주년을 계기로 식민사관 프레임을 걷어내고 의친왕의 정신을 올바르게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종황제의 차남, 의친왕 이강 (1877-1955) |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장군), 대한적십자사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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